박도하 지음
쪽수 | 20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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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25*190 |
ISBN | 979-11-6861-179-5 03810 |
가격 | 16,000원 |
발행일 | 2023년 10월 19일 |
분류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책소개
엄마는 사랑해본 적도 없잖아
아픈 곳에서 탄생하는, 시작부터 위태로운 사랑
바래지는 자아 속에서 사랑을 찾다, 박도하 첫 번째 장편소설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피비」로 작품 활동의 시작을 알린 박도하 소설가의 첫 장편소설. 소설가 김인숙은 단편소설 「피비」의 심사평에서 “마치 주어진 옷을 입듯이 주어진 제도에 갇혀, 그 안에서 서서히 소멸돼가는 자아. 이제 와서 무엇이 새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 그 질문에 도달하려는 ‘피비’의 안간힘이 안타깝다”고 평한 바 있다. 『기연』 또한 이러한 질문을 기반으로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서서히 자아가 소멸되고 있던 기연을 불러내 중심인물로 이끈다. 작가는 대충 묶어둔 매듭 같은 가족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년 여성의 자아와 삶,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그 심리를 반짝이는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삼십여 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지만 자신의 삶과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는 한 남자와의 조우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래, 이년아. 너는 참 좋겠다
딸의 결혼과 엄마의 자리
오랜 시간 욕망의 주체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기연에게 딸의 결혼은 어머니로서 가졌던 애착의 자리마저 이제 소멸했음을 알린다. 그렇게 딸아이가 떠난 뒤 자신이 인생의 변두리 즈음에 놓였다 생각했던 기연에게 치수와의 사랑은 어떤 삶을 다시 살아가게끔 자리를 내어준다. 사랑은 그녀를 생의 주인공으로 부른다. _강도희(문학평론가)
기연은 공무원이 된 어린 딸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남편과 사랑을 주고받아본 적 없는 그녀는 늘 자신을 비난하기만 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딸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연은 딸의 혼수를 준비하기 위해 자기 딸의 이름과 똑같은 ‘재연이불집’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만난 이불집 사장 박치수에게 이끌린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에 혼란을 느끼던 그녀는 이불가게 주변을 배회하다 어지럼증으로 근처 의자에 앉아 잠시 의식을 놓게 되는데, 그 모습을 치수가 발견한다. 이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마음을 나누게 되지만 기연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무언가가 치수와의 만남 이후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왜 인간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걸까
사랑의 성공이 결혼으로 끝나기에는 숱하게 많은 위기와 좌절이 그 후에 찾아온다. 가족 내부에서 모순과 소외감을 경험한 여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얼마나 실패했는지 가늠한다. 그렇다고 서로를 동경하고 다른 길을 택하기에는 타인의 실패가 갖는 무게도 만만치 않다. _강도희(문학평론가)
『기연』에는 기연뿐 아니라 가족 속에서 자신의 희미한 존재를 느끼는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시점이 드러나 있다. 이혼하고 화가로서 홀로 삶을 살아가는 기연의 친구 주선, 오랫동안 혼자서만 가족의 의무를 이행하고 가족을 지탱해온 치수의 아내 미옥, 집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엄마를 보면서도 여전히 결핍을 느끼는 한성의 딸 예리 등 이들은 모두 가족의 부재를 느낀다. 가족이 있음에도 느끼는 부재의 감각은 해당 인물의 자아를 더 옅어지게 만든다. 남편, 자식,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를 오래 곱씹어 나타나는 것은 텅 빈 결락감이다.
내 딸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갑자기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연은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딸이 있기에 그녀는 세상 쪽으로 바짝 붙어 걸을 수 있었다. 둥근 볼과 부드러운 이마를 지닌 아기였던 내 딸. 내 딸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_p.179~180
비록 자식과 가족이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마음속의 허무를 생성하게 한다 할지라도 기연은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딸, 자식은 절대 나와 동일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딸 재연은 기연의 일부이자 기연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택하게 하는 이유이다. 딸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녀는 딸에 대한 사랑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생명이라는 빛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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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첫 문장
기연이 치수를 처음 만난 곳은 이불 가게였다.
20~21쪽 엄마는 사랑해본 적도 없잖아. 사위를 처음 본 날이었을 거다. 나이도 많고 인물도 없고 인상도 좋지 않은 터라, 기연은 딸아이에게 싫은 소리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런 기연에게 딸아이는 말했다. 그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자꾸 튀어 올랐다. 그 말은 질문이 되어서 기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사랑을 해보았나. 사랑이 뭔가. 남편을 사랑하는가. 남편은 나를 사랑하는가.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기연은 답답했다. 벚꽃이 피면 예쁘다 하고, 딸아이를 키우며 예쁘다 사랑한다, 확신한 적은 있으나 사내를 보고 예쁘다, 어여쁘다, 귀하다, 안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다. 그녀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눈이 벌게지도록 잠들지 못한 밤에. 재연아, 사랑이 뭐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가 돌멩이처럼 몸속을 떠다니며 그녀를 아프게 했다.
39~40쪽 이 모든 게 삼십 년이 다 되도록 지속되었다는 것이 그저 지겨울 뿐이었다. 이제, 유일한 자식인 딸도 결혼하는 마당에 대충 묶어둔 매듭 같은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가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에어컨을 켜긴 했지만 반팔 티셔츠와 긴 치마 안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표면은 축축한데, 속은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몹쓸 허기가 깊숙이 자신을 갈라놓았다. 그건 단순한 공복감이 아니었다.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볼 때마다 뿌리 깊게 파고드는 텅 빈 결락감이었다.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며 제 남편 될 사람을 챙기는 재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년아, 너는 참 좋겠다.
76쪽 왜 인간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걸까. 주선은 또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어제 새벽 기연은 조금 부서졌다. 물건들과 함께 그림과 함께 조금 훼손되었다. 조금씩 훼손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사람들. 늙어가는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완벽한 고장을 드러냈다.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주선은 알고 있었다. 이 완벽한 화장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도 오늘, 지금 이 순간은 거울을 보며 안도했다. 그녀는 백화점 화장실이 좋았다. 따스한 불빛이 부드러운 음영을 얼굴에 드리우며 적당히 적당히 가려주었다.
저자 소개
박도하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피비」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차
그림이 없는 밤
수영과 담배
검은 얼굴
못생겼지만 맛있는
안개의 말
햇살이 내려와
해설: 한 차례 아팠던 그 사랑은 이제_강도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기연을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