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삽미의 비

하근찬 지음
쪽수
276쪽
판형
152*255
ISBN
979-11-6861-104-7 04810
가격
22,000원
발행일
2022년 11월 12일
분류
하근찬 전집 7

책소개

일상에 파고든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의 ‘바깥’


전집 7권 『삽미의 비』에 수록된 10편의 단편은 일제 말엽을 소환하는 작품,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나뉜다. 하근찬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틈입한 현실의 정세를 통해 꾸준히 당대를 그려내고 있다.

1970년대 초에 주인공 훈구가 일제 우산을 선물 받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표제작 「삽미의 비」는 한 사회의 인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간이 그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그 사회의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바깥’을 사유할 필요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처럼 하근찬이 반복적으로 써낸, 『삽미의 비』에 수록된 일제 말기 관련 작품들은 학교라는 장소를 통해 지배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폭력적 이데올로기가 비판 없이 삶에 내재화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까지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즉, 전집 7권의 의의는 과거를 의미 있게 불러들이는 작품들과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진단하는 작품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하근찬을 ‘투철한 현실감각을 지닌 작가’로 재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와 길항하려는 개인들



먹는 것은 그렇게 적게 주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달갑지 않은 일은 주로 우리에게 안기는 것이었다. 기숙사 내외의 소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역에 나가 채마밭에 똥물 주기, 취사장의 오물 치우기, 하수구 청소하기 같은 형편없는 일도 주로 우리 차지였다. 그리고 상급생들의 내의 세탁도 해야 했고, 심지어는 그들의 등덜미까지 두들겨 주어야만 했다. 우리가 무슨 안마사이기나 한 것처럼. 그런 일은 정말 못마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_「수양일기」 중에서

「수양일기」에는 국가이데올로기를 규율, 권력 삼은 교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작중에서 ‘나’는 과거의 마치 병영과 같은 학교 안에 유폐되어 있다. 조선 학생들은 통학을 금지당한 채 공부 대신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한 근로봉사에 복무하였고 굶주림과 향수병에 시달린다. 

이 고된 일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바로 ‘수양일기’로, 학생들은 매일 의무적으로 자신의 일과를 기록한 후 담당 교관에게 검사를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수양’은 ‘자기반성’을 일컫는바, 학교의 질서와 규율을 단순히 피지배자에게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내면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당대 지배이데올로기의 골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가 일기의 이 같은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하근찬은 이 세계를 온당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은 정치적 환경이나 권력자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와 길항하려는 개인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민중의 삶에 주목한 소설가 하근찬, 전쟁의 주변을 세세히 살피다


2021년에 ‘하근찬 전집’ 발간의 첫 시작을 알리는 『수난이대』 외 4종이 발간된 후, 2022년 11월에 하근찬의 소설, 중단편집 제5권 『낙도』, 제6권 『기울어지는 강』, 제7권 『삽미의 비』과 장편 제11권 『월례소전』이 2차분으로 발간된다.

2차분으로 발간되는 작품 속에서 하근찬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인들의 모습 그리고 삶과 시대의 풍랑 속에서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 전쟁의 주변, 바깥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증언하듯 그려내고 있다.

제5권 『낙도』에서는 1년 5개월 만에 어렵게 일자리를 얻었지만 병역 기피자 대상 예비역 훈련 소집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명구’, 특정 학생에게 특혜를 주고자 하는 학교의 처사에 저항하는 교사 ‘혜영’ 등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자본 권력이 만들어놓은 기형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으며, 제6권 『기울어지는 강』에서는 시골을 등지고 무조건 도시로 향했다가 녹록지 않은 서울 생활로 인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는 ‘병태’ 등의 인물들을 통해 전쟁을 다루지 않으면서 70년대의 소시민의 삶을 그린다. 

또 제7권 『삽미의 비』에서는 시인 ‘남궁’ 씨가 경험한 소소한 일화를 통해 1970년대 산업화 사회의 그늘을 가시화하는 청년의 사연을 드러내기도 하며, 제11권 장편 『월례소전』에서는 ‘월례’라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며 일제강점기 등 혼란했던 사회 속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들의 삶을 통찰한다.


잊혀지고 배제된 존재들을 기록하는 하근찬의 시선


하근찬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망각된 존재들의 복원된 목소리와 본인의 경험을 중첩시켜 더 큰 파동을 만들며, 그 파동은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계속해서 공명할 것이다.

하근찬은 당대 민중들의 삶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잉여적인 존재’들의 삶을 배제해왔는지 그려내고 있으며, 역사에서 지워지는 주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식민지 말기를 다루면서 식민지배로 인해 고통받았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하근찬 문학전집 간행위원회가 “한 작가의 문학적 평가는 전집이 간행되었을 때 비로소 그 발판이 마련된다”고 언급한 것처럼, 향토성 짙은 하근찬의 작품을 그의 고향인 영천의 사투리를 살려 발간한 <하근찬 문학전집>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의의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제5권 『낙도』는 최슬기 문학연구자가, 제6권 『기울어지는 강』은 신현아 문학연구자가, 제7권 『삽미의 비』는 전소영 문학평론가가, 제11권 『월례소전』은 서승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각 작품의 해설 작업에 참여하여 하근찬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첫 문장                                                                                         

해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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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p.51-52

민재는 어느새 한 팔로 아가씨를 안고 노닥거리면서,

“가져와, 가져와. 얼마든지 가져와. 이 집 맥주 오늘 밤에 내가 전부 샀다. 전부, 전부…….”

이렇게 호기를 부려 댔다.

얼마 후, 윤구도 이제 서먹서먹한 기운이 가셔져서, 제법 아가씨의 손도 잡아보고, 도도록한 무르팍의 맨살을 슬슬 어루만져보기도 하며,

“연애 한 번 할까? 연애 한 번 할까?”

히죽히죽 뇌까리기까지 했다.

_「특근비와 팁」 중에서


p.126

“일본 제품을 매일 쓰면서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어쩌고저쩌고하는 놈들은 모조리 위선자야! 위선자!”

아무리 술기 탓이라곤 하지만 너무한 것이었다. 숫제 시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뭣이 어째?”

훈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선자라는 말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훈구가 일어나자, 미스터 윤도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 서로 주먹질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_「삽미의 비」 중에서


p.173

“가만, 맥주 두 병 주쇼.”

남궁 씨는 맥주를 두 병 샀다. 청년은 고맙다는 듯이 웃고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왔습니다, 왔습니다— 맥주가 왔습니다. 사이다에 쥬스, 콜라가 왔습니다— 자— 식사대용에 맛 좋고 배부른 빵도 왔습니다— 카스텔라도 왔습니다—”

말하자면 청년은 ‘책임 완수를 다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외치는 소리는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서의 기쁨의 소리에 틀림없었다.

_「후일담」 중에서


p.250

온통 치마가 젖어 있었고, 저고리도 소매 끝부분은 물에 담근 듯했다. 연한 주황색 저고리였다. 우산에서는 빗물이 아직도 줄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나오시느라고…… 이런 날은 집에서 떠도 되는데…….”

나는 얼른 벽에 걸린 수건을 벗겨 누님에게 건넸다.

“아파서 치료를 받는 사람이 비가 온다고 치료를 받으러 안 오면 되나.”

누님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이랑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_「두 죽음」 중에서



작가 소개                                                                                       

하근찬(河瑾燦, 1931~2007)

193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동아대학교 토목과를 중퇴했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가 당선되었다. 6.25를 전후로 전북 장수와 경북 영천에서 4년간의 교사생활, 1959년부터 서울에서 10여 년간의 잡지사 기자생활 후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단편집으로 『수난이대』 『흰 종이수염』 『일본도』 『서울 개구리』 『화가 남궁 씨의 수염』과 중편집 『여제자』, 장편소설 『야호』 『달섬 이야기』 『월례소전』 『제복의 상처』 『사랑은 풍선처럼』 『산에 들에』 『작은 용』 『징깽맨이』 『검은 자화상』 『제국의 칼』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 조연현문학상, 요산문학상, 유주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7년 11월 25일 타계, 충청북도 음성군 진달래공원에 안장되었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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