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지음
쪽수 | 2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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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35*200 |
ISBN | 978-89-6545-769-5 03810 |
가격 | 16,000원 |
발행일 | 2021년 12월 14일 |
분류 | 한국 소설 |
책소개
현대 가족 공동체 속의 모순과 갈등
‘가족’이라는 통증을 표출하는 이경미의 첫 소설집
섬뜩한 가족의 서사로 가족 공동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이경미의 첫 번째 소설집. 저자는 현대 가족 공동체가 만들어낸 모순과 그 속에 내재한 갈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녀가 표현하는 가족은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구축해온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린다. 아내의 외도에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남편, 부모에게 패륜을 일삼는 아들, 어머니에게 이상적 집착 증세를 보이는 청년 등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사회 속에서 좀처럼 부각되지 않는 ‘가족’이라는 통증을 감내하고 있다. 가족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이 충분히 나왔음에도 계속해서 가족에 대한 소설이 쓰이고 있는 이유는 아직 그것에 대해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집에 담긴 7편의 소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창구가 되길 바란다.
자기 몫의 상처를 견디는 꽃잎들
「누름꽃」은 이경미 작가의 등단작으로, 패륜적인 발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아들과 그 가족에 얽힌 고통스러운 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아들의 욕설과 폭력적인 행태에도 가족은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압화 작가인 여자는 계속해서 꽃을 누르고 또 누르며 하루하루를 견딘다.「누름꽃」의 심사평에는 “자기 몫의 상처를 견뎌야 하는 짓눌려진 꽃잎”으로 인물들을 표현한다. 패륜적인 아들의 행태에 자신을 누르고 누르는 부모도, 세상에 눌려 자기 부정의 형태로 분노를 표출하는 아들도, 잔뜩 눌려진 채 저마다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는 마지막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골목으로 새어 나온 불빛에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남편도 섰다. 아들이 빌라 현관을 쓸고 있었다. 둥그런 등허리가 발가숭이 적 아들의 순한 몸이었다. 여자는 콧등이 시큰했다. 사금파리 같은 파편을 쓸고 있는 아들의 등이 노란 애기똥풀 꽃잎처럼 둥글었다. 뱃속에서도 저렇게 둥글었겠지. 아들이 뱃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때 툭, 툭, 발질하다 잠잠하던 몸짓이 오롯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태몽을 꾸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하지만 하루 반의 산통은 아들과 여자의 몫이었다. (…) 한 줄기 온기가 가슴에 흘러드는 듯했다. 여자가 반지 낀 손으로 남편의 팔을 잡았다. 언젠가 처연히 엄마, 하고 부를 아들을 기대하며 환한 쪽으로 걸었다. ―「누름꽃」에서
표제작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는 정신과 의사인 ‘나’가 미대생 ‘안’의 상담을 맡게 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다. ‘나’는 안과의 상담을 통해 자신의 가정사를 떠올리고, 그의 사연에 몰입하게 된다. ‘안’은 자신이 빠져 있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를 지킬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안’의 이상 집착 증세를 발견한 ‘나’는 그녀의 갤러리를 방문하고 그곳에 놓인 녹색 침대를 발견한다.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는 미스터리한 관계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예상 밖의 공포를 선사한다. ‘나’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갤러리를 둘러보다 보면 어느 새 ‘안’이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인물들
「빗속을, 지나는」에서는 가정 폭력에 장기간 노출되어 오히려 폭력을 느낄 때에 안정감을 느끼는 지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나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엄마와 지나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 그것을 견디다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가고, 지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지나는 장난스럽게 수에게 채찍을 건네고 수는 지나가 건넨 채찍을 받아 든다. 「빗속을, 지나는」은 가정 폭력에 노출된 한 피해자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 위험 상황을 벗어난 상태에서도, 스스로 마련한 위험 속에서 위험을 통제하며 안정감을 느끼던 지나는 폭력이 아닌 다른 이름의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 밤에 강물이 반짝인 이유는」은 하나의 사건을 중심에 두고 도처에 있는 아픔과 상징들을 각각의 장면으로 흩어놓는다. 각 사건은 서사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실내에 누워 있는 시체 두 구, 아이들과 남편을 태운 채 사라지는 기차, 늙은 엄마와 시장을 누비는 ‘나’ 등 환시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어 해당 사건을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트라우마가 남을 만큼 아픈 사건을 겪으면 그 기억에서 도망치고, 상황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환상 속을 헤매는 인물은 서사가 아닌 이미지로 우리의 앞에 서 있다.
아픈 이야기 속에 숨은 희망이라는 씨앗
이경미의 소설에는 가족이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파편화된 가족이 겨우 연명을 하듯 불규칙하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 구성원들은 소설 속에서 갈등의 서사구조를 이루며 하나같이 가슴 밑바닥까지 긁어대는 섬뜩한 외로움에 떨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그들의 모습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들의 가족사가 노골을 드러낸 채 아프게 투영되어 있다. _이평재(소설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특히나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가지는 고통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통증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처를 입었을 때에 상처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지 않는다.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이경미 작가는 이 아픈 이야기들 속에 미약한 희망을 심어 놓는다. 언젠가 그 희망이 싹을 틔워 찬란한 미래로 피어나길, 그리하여 우리의 상처에 튼튼한 나무가 뿌리내리길 간절히 바란다.
첫 문장
여자는 핀셋으로 붉은 조팝을 집었다.
책 속으로
P.10 중얼거리는 소리, 세면대에 물 내려가는 소리, 물소리가 멈추고 다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하진 않지만 뻔한 내용에 욕이었다. 여자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작업대로 쓰는 소반을 짚고 일어났다. 아들에게 새벽부터 도매시장으로 출근한 남편과 자신의 모습이 열심히 사는 태도로 보일까 해서 열어둔 방문을 닫았다.
P.43 갤러리 내부는 천장과 벽, 바닥이 모두 회백색이고 서른 평쯤 돼 보였다. 안내 데스크 위에 스테인리스 조형물 하나가 놓였을 뿐, 일체의 장식이 배제된 공간 같았다. 건너편 그림 사이에서 여자가 불쑥 나왔다. 자그마한 키에 가녀린 체구, 쌍꺼풀 없는 눈이지만 눈매가 또렷했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웃음을 살짝 머금고 고개를 까닥했다. 체구에 걸맞지 않게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중년은 넘은 듯한데, 맑은 피부와 외모만으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여자를 만나고 있는 것을 안이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죽이려 들지도 몰라, 아니면 돌아버리거나. 전시된 그림에 눈길을 주며 천천히 걸었다.
P.107 겨우 절반 왔는데 허벅지가 뻣뻣하다니, 제기랄. 출발 전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만.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두려운지, 결승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두려운 건지…… 사실, 사업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다고 미란이 공박할 때마다 인생이 장난이냐고, 내가 얼마나 심사숙고했는지 알기나 하냐고 한마디 하고 끝내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업 실패가 인생 실패라니……
P.194 달빛이 간간이 숲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나무는 나무이고 달빛은 달빛이었다.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아. 이 숲처럼, 저 산처럼 분명하다면 세상 걱정이 반으로 줄 거야. 숲이 있고 바람이 있고 달빛이 있다고 생각하니 걸을 만했다. 약간 설레는 기분이 되었고 알 수 없는 가락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작가 소개
이경미
2007년 <기독교문예>와 2009년 <창조문학신문>으로 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오월문학상(전남대) 가작으로 단편소설 「퍼즐」이,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누름꽃」이 당선되었다.
저서로 스마트 소설집 『스마트 소설』(공저),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공저)이 있다.
차례
누름꽃
녹색 침대가 놓인 갤러리
나를 보내는 숲
마라톤은 즐거워
빗속을, 지나는
그 밤에 강물이 반짝인 이유는
퍼즐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