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고흐의 변증법

심은신 지음
쪽수
256쪽
판형
140*205
ISBN
978-89-6545-755-8 03810
가격
15,000원
발행일
2021년 10월 20일
분류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책소개

나의 밤도 언젠가 끝날 수 있을까요?

흐릿한 현실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바라보다


심은신 소설가의 두 번째 단편집. 심은신의 소설 속에는 다양한 문학적 공간이 등장한다. 러시아 아무르 강과 울산의 태화강, 펭귄이 서식하는 남극기지, 고흐의 도시 아를 등 인물들은 생동감 있고 다양한 문학적 공간들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8편의 소설에는 삶과 일상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고민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앞에 놓인 현실은 외롭고 막막하지만, 미미한 빛으로 전해지는 한 줄기 희망이 그들의 삶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다.


그림자 덮인 어두운 하늘,

우리의 도시는 아름답다


「떼까마귀」 민우는 울산시의 아시아조류박람회 사진전 기획을 맡아 철새 사진작가 무연에게 자문을 구한다. 울산 조류의 상징인 떼까마귀에 대해 무연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만, 군집공포증이 있는 민우는 떼까마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감출 수 없다. 실리만 따지는 것 같은 울산이라는 도시도, 불쾌감만 자아내는 떼까마귀도 민우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존재들일 뿐이다. 무연은 그런 민우에게 떼까마귀의 터전인 아무르 강에 얽힌 역사적 인연과 그가 철새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민우는 점점 그 이야기에 빠져 든다.

「봄날의 아가다」 극빈 가정 공부방 돌보미로 일하는 선혜는 아이들을 데리고 언양성당으로 나들이를 떠난다. 마냥 밝아 보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얌전히 기도를 드리는 수인. 초등학생의 몸으로 게임중독 아버지와 오빠의 뒷바라지, 각종 집안일을 맡는 수인은 그녀를 향해 어른스럽게 웃어 보인다. 선혜는 수인을 보며 남의 생명을 살리려다 깨어나지 못하게 된 남편 창현을 떠올리며, 자신과 수인의 좌표가 어디쯤 있을지를 그려보고, 어느 새 수인은 ‘동정 순교자 김아가다’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눈물을 보이는데….


상처뿐인 사랑과 현실,

그곳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고흐의 변증법」 정신과 의사인 유지는 한때 열렬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다. 이혼 이후 환자들과 간호사들에게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던 유지는 신혼 여행지였던 아를로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서 우울해 보이는 무명의 영화 감독 고호상과 조우한다. 고호상은 여자친구의 권유로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자 고흐가 사랑한 도시인 아를로 왔다고 말하고, 유지와 고호상은 현실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흐와 그의 작품, 영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예시로 들며 토론을 나누기 시작한다.

「알비노」 십년 전 상담을 받았던 희주는 당시의 상담선생님에게 편지를 쓴다. 까만 피부가 고민이었던 희주에게 백색증을 앓던 학생을 언급하며 격려해준 선생님. 당시 아버지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던 희주는 아버지를 닮은 까만 피부가 싫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과거사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유전 열성으로 이루어진 알비노가 자신과 닮았다고 말하는 희주. 희주는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의 필우를 보듬으며 자신의 처지를 위로했다며, 그가 폭력을 행사해도 떠날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와

생존법을 물어볼 수 있을까요?


「초롱아귀」 9급 행정 공무원인 정환은 적은 월급과 반복되는 업무에 회의감을 느낀다. 어느 날, 함께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병우에게 편지 한 통을 받게 된 정환. 공무원 준비를 하며 정환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병우는 망막변성증이라는 병을 발견하여 행정직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여러 번 새로운 창업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그는 편지를 통해 현재 산토스에 있으며 마리아나 해구로 떠날 것이라 알려오고, 정환은 술만 마시면 마리아나 해구에 대해 떠들어대던 병우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눈」 실직 후 여름이 도래한 남극으로 펭귄의 생태를 연구하러 떠난 우진. 생계는 물론 연인인 은수의 임신까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을 안고 남극으로 왔다. 우진은 막 부화한 새끼 펭귄을 보며 드레이크 해협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떠올린다. 바다보다 자식을 못 먹이는 게 더 무섭다던 아버지. 연구원인 우진은 아비 펭귄을 잃어버린 새끼 펭귄들을 지켜본다. 치열한 자연의 세계에서 아비를 잃고 살아갈 새끼들. 그때 갈매기가 수영 연습 중인 새끼 펭귄 한 마리가 낚아챈다. 우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본다


「인디고 블루」 의상 디자이너인 윤희는 가을을 겨냥한 컬렉션의 디자인에 고민한다. 새로 부임한 실장이 개인별로 차등고과를 줄 것이라 선언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어떤 컬러의 스커트가 좋을지 고민하며 윤희는 전쟁 후 도발적인 A라인 컬렉션을 내놓았던 크리스챤 디올을 떠올린다. 윤희는 위축된 현실에 위로와 열정을 선사하는 옷을 고민하며 자신의 재능을 한탄하고 윤희의 동기인 지현은 그녀가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치부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지현과 대척점에 있는 윤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디자인 발표일이 밝아오고 윤희는 지금껏 고민하던 컬러와는 전혀 다른 컬러를 선보인다.

「구라미」 본사의 전무로 몇십 년을 일에만 집중해온 남편. 남편의 노고와 바쁜 생활을 알기에 ‘나’는 그를 이해하고 아이들을 키운다. 하지만 얼마 전 중요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인사개편을 당한 뒤, 남편은 자회사의 어설픈 사장 직책을 맡는다. 연봉도 적고 특별한 관리도 필요하지 않은 업무지만 ‘나’는 어떻게든 정년까지 버텨야 한다 종용하고, 남편은 애써 이제야 가정에 충실할 수 있겠다 말한다. 남편은 수족관 코너에서 작은 원형 어항과 함께 관상어 3마리를 구입하고 매일 구라미를 관찰하지만, 남편의 어항에 들어온 이후 블루마블 구라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곳,

이곳에서 시작하는 ‘둥지의 서사’


심은신의 소설 속에는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문학적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그 문학적 공간은 때로는 멀리 있기도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바로 이 공간이 되기도 한다. 


심은신의 둥지의 서사는 매우 중요한 소설적 발명이다. 이동과 이주가 빈번하고 방황과 유동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해체되고 파괴되는 둥지를 새롭게 만들려는 인물의 창조가 빛난다. (…) 소설은 인물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심은신의 인물들이 우리 사회의 제유임을 안다. 더 복잡한 상호텍스트성의 역장으로 구성의 힘들을 이끌어 가리라 믿는다. 어둡고 힘든 시대의 삶이지만 사랑과 희망이 비록 미미한 빛으로 존재하더라도 소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신념에 경의를 표한다. _구모룡(문학평론가)


이 소설집에 담겨 있는 인물들은 특별하지 않다. 사랑에 상처를 입거나,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업에 대해 고민하거나, 부모가 된다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민하며 살아간다. 소설의 말미에서도 그들의 처지가 크게 달라지거나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발견하는 한 줄기 희망이 있다. 외롭고 힘든 우리네 현실에도 마치 이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한 줄기의 희망이 드리우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심은신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 별 볼 일 없는 공간에서도 그런 희망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첫 문장

이제 곧 그들이 검은 형상을 드러낼 시간이다.



책 속으로

p.25 그의 손가락을 따라간 시선 끝에는 이제 막 떼까마귀의 군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 무리에 다른 무리가 섞여들고 또 다른 무리가 더해져 더 큰 공동체로 커졌다. 몇 무리로 나뉘어 종일 먹이를 구해 몰려다니다가 대숲 가까이 다시 모여든 까마귀들이 회색 공간을 자유롭게 날았다. 하늘로 치솟는가하면 아래로 내리꽂히고, 다시 바람을 타고 급하게 비상하여 바람과 함께 공간을 유영했다. 청회색 하늘을 가득 메운 일몰 군무가 촉각적 심상이 되어 피부에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가늘게 뜬 눈에 차고 건조한 공기가 와서 부딪쳤다. 시린 각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느 북국의 하늘처럼 차가웠다.


p.96 선생님은 온몸이 하얀 사슴, 온몸이 하얀 고라니, 온몸이 하얀 원숭이, 온몸이 하얀 참새를 보신 적 있나요? 그때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있던 인터넷 기사는 바로 백색증을 앓는 알비노에 관한 거였어요. 눈부시게 하얀 사슴 사진에 놀라 기사를 열었던 것 같아요. 유전자 돌연변이인 알비노는 멜라닌 색소 생성이 되지 않아 발현한다고 했어요. 다른 건 모두 정상인데 효소 하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서 멜라닌이 만들어지지 않고 결국은 티 하나 없이 하얀 몸의 알비노가 된다는 거예요.


p.143 고향 항구에서 출항하는 외항선을 탔습니다. 언젠가 정환 씨에게 말했듯 육지의 끝은 바다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꿈을 안고 떠나는 곳이죠. 솔직히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막다른 골목이어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마리아나 해구를 찾아가는 겁니다.


p.179 구라미가 죽은 건 남편이 사표를 던진 날 아침이었다. 이상한 예감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구라미는 허연 배를 뒤집은 채 수면에 떠서 역한 냄새를 풍겼다. 이른 아침 미명에 목격한 구라미는 수감 생활을 견디다 못해 목을 맨 죄수 같았다. 좁은 어항에서 살기엔 지나치게 길고 거추장스러운 수염이 수면 위 사선으로 솟아 있었다.



작가 소개

심은신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문학을,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했으며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2016년 단편 「마태수난곡」으로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과 6월 항쟁 30주년을 기념해 장편 『바람기억』을 출간했다. 2018년 단편집 『마태수난곡』을 출간했고, 한국소설가협회 신예작가로 선정돼  『2018 신예작가』에 단편 「이마고」를 상재했다. 2019년 맹목적인 인간의 욕망을 다룬 장편 『버블 비너스』를 출간했으며, 같은 해 단편 「알비노」로 경북일보문학대전에서 수상했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및 소설 21세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떼까마귀 

인디고블루

고흐의 변증법 

알비노 

초롱아귀 

아버지의 눈 

구라미 

봄날의 아가다


해설: 둥지의 서사학-구모룡(문학평론가)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