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정태규 소설가가 소설집 『길 위에서』를 출간하였다. 이는 작가가 첫 소설집 『집이 있는 풍경』을 낸 지 10여 년 만에 선을 보이는 것이다.
작가는 1집을 낸 후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많이 방황했다고 한다. 쓰고 싶은 절실한 것, 지향할 만한 가치, 온전히 나만의 색깔을 지닌 성찰,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을 수가 없어 많이도 절망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절망 속에서 간간이 써낸 이번 2집의 작품들은 그래서 대부분 어두운 색채로 마무리 되어 있다. 그러나 희망 없음의 언술이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갈구와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한 희망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20대가 읽어내기에는 다소 어렵고 칙칙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작가와 같은 세대로서 같은 사회적·역사적·문명적 체험을 공유하고 있을 4,50대 남성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고, 인간에 대한, 시대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
이 소설집은 다양한 상상력의 변주를 지향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상상력, 사회 역사적 상상력,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대한 상상력의 형상화 등, 한 유형의 상상력을 일관되게 보여주기보다 여러 유형의 상상력을 보여줌으로 해서 한 작가의 역동적인 상상력의 지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그로테스크한 실험적 기법과 풍자적 기법, 패스티쉬의 기법 등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길 위에서』는 총 9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1편의 중편 「브루스 리를 추억함」과 「솔베이지의 노래」 「시간의 향기」 「정글게임」 등 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9편의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밑바탕으로 깔고 있다. 정태규 소설은 어느 한 문제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품었던 의문들 예를 들면 사랑이나 죽음, 정체성, 현대문명에 대한 문제점 등 여러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번 소설집은 크게 세 가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삶에 대한 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영원한 주제인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솔베이지의 노래」),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아버지 찾기(「길 위에서」), 무한한 우주의 시간 앞에 선 유한한 인간의 비애(「시간의 향기」),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의 문제(「구글 어스」), 인간 삶의 비정함에 의해 현실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가는 인간의 모습(「겨울에서 봄으로」)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 역사적 상상력의 장이다. 이제는 개념적으로 남아있거나 아예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남북분단 문제와 통일 문제를 다루고 있는(「육교를 건너서」), 독재정권의 전체주의와 판옵티콘의 상황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다루고 있는(「감춰진 머리」), 군부 쿠테타의 현장을 통해 거대 권력적 상황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을 다루는 것(「브루스 리를 추억함」) 등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현대문명 비판과 실험적인 상상력의 장이다. 끊임없이 현대인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현대문명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증을 다루는 작품(「구글 어스」), 현대세계의 비정함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작품(「겨울에서 봄으로」), 컴퓨터의 기술적 세계에 의해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미지화 되어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실험적 비판을 다루는 작품(「정글 게임」) 등이 그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는 따뜻한 작품세계
정태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정태규를 휴머니스트라고 한다. 사람을 대할 때 따뜻한 품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정태규의 작품세계와 닮아있다. 예리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유가 작품 속에 오롯이 녹아있다. 정태규 소설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서부터 현대문명 비판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문제의 본질을 강하고 직설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작품의 지류인듯 본류인듯 이 갈피 저 갈피와 뒤섞이면서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평론가 구모룡은 정태규의 소설을 일컬어 그의 문학의 밑변에 거의 고전적인 형태에 가까운 휴머니즘이 놓여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자는 항상 왜 소설을 쓰는가를 화두처럼 달고 산다고 한다. 저자에게 굳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무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소설을 쓰면서 늘 부닥치는 의문 하나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늘 풀리지 않는 화두처럼 나를 괴롭힌다. 나는 정말 거기에 대한 대답을 조금도 준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소위 잘나간다는 작가들이 대담 같은 데서 밝히곤 하는 것처럼 멋져 보이는 이유를 하나쯤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내가 왜 일상의 욕망을 상당량 포기해가며, 쉽게 상처받아가며, 쓸데없이 절망해가며 소설을 써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래도 굳이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소설은 하나의 위안이라는 것이다. 상처받고 슬프고 불안으로 흔들리는 영혼에 대한 하나의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설은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불안을 잠재워주는 따스한 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또한 소설은 하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되고 진지한 영혼이 저 거짓과 경박의 현실에 의해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하나의 힘이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소설은 그런 영혼을 응원하며 조용히 펄럭이는 깃발이 아닐까 한다.
결국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런 영혼들에 하나의 위안과 힘이 되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소설쓰기가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위안과 힘이 되었는지는 확실히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내 소설이 그들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안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위안과 진실의 힘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나는 진실로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작품을 썼는지 자신할 수 없다.”
시골 농가의 마당가에 등황색의 감들을 달고 서 있는 감나무처럼 우리의 삶도 저렇게 풍성한 사유로 가득하기를, 우리 삶이 아프고 힘들지만 자기 삶에 대해서 스스로 강퍅해지지 않기를 이 책을 내면서 저자는 바라고 있다.
작품 소개
「솔베이지의 노래」
13년 만에 운명의 그녀가 다시 그를 찾아온다. 낮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밤에는 학원강사 노릇을 하던 고달픈 시절에, 대학 선배의 간곡한 요청으로 나가게 된 야학에서 운명의 여인 윤서를 만나게 된다.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그녀의 페르퀸트가 있다. 그러나 그 페르퀸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윤서는 아직 과거에 갇혀 살고 있다. 다시 만난 윤서로 인해 풋풋했던 사랑의 기억들을 떠올리는데...
「길 위에서」
조그만 광고회사에서 도안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진우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위해 월남전 후유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아버지란 이름 혹은 그 이름의 허망한 흔적 그리고 그 이름이 되살려 줄 혐오스런 유년의 기억들’을 ‘아버지 찾기’라는 과정을 통하여 풀어내면서 진정한 자기인식을 찾아 나서는데...
「구글 어스」
어느 날 아내의 강박증세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뉴스에 나온 살인사건을 보며 식칼과 과도를 숨기고 플라스틱 제품들의 환경호르몬 검출 뉴스에 모든 그릇을 사기그릇으로 바꾼다. 거식증 증세까지 나타나며 점점 정도가 심해지는데...
영화감독의 꿈을 간직한 채 학원강사로서 매일 매일 집과 직장 사이를 시계추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가며 수업시간마다 똑같은 소리를 레코드판처럼 지껄이는 자신의 삶이 우리에 갇혀 뱅뱅 돌고 있는 표범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탈주의 꿈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가 선택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에 대한 도피로 밤마다 구글 어스를 찾아 사이버 공간을 유영하는데....
「시간의 향기」
아내의 죽음을 아내와 함께 갔던 공간을 여행함으로서 극복하기 위해 딸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 딸 민지는 죽은 아내 선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무한한 우주의 시간 앞에 선 유한한 인간의 비애가 주인물의 잔잔한 내면의 흐름을 따라 그려진다.
「겨울에서 봄으로」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 늘 보는 얼굴들과 늘 같은 대화를 나누고 비슷비슷한 서류들을 꾸미고 그게 그거인 계산들을 해대고, 늘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가진 거래처의 사람들을 만나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나는 정체모를 편두통에 시달린다, 두통이 우울증을 데리고 방문하는 날이면 아파트 입구에 늘어선 포장마차엘 혼자 들르곤 하는데... 그곳에서 문제의 그 사내를 만나게 된다. 그 사내는 난데없이 별 이야기를 꺼내는데...
「육교를 건너서」
거렁뱅이 영감이 하나쯤 육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야 일상적인 풍경이랄 수 있다. 그러나 그 영감의 몰골이 어딘가 낯익어, 나는 가던 길을 멈춘다. 그 영감은 오래 전, 정확히 말하자면 17년 전쯤 내가 알았던 얼굴과 퍽이나 닮아 있었다. 내 젊은 날에 만났던 연민과 안타까움과 비애의 한 실체와 다시 조우하는 느낌이 들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는데...
「감춰진 머리」
사방벽에 창문 하나 나 있지 않다 정면의 출입문마저 차갑고 완강한 표정으로 굳게 닫혀있다. 지나가는 바람소리나 사람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들리는 거라곤 K 자신의 숨소리뿐. K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K는 스스로를 의심해본다. 혹시 무심코 범해서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과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억을 되살리는데...
「브루스 리를 추억함」
리어카 좌판에 널려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둘러보다가 하나의 비디오테이프가 나의 눈길을 끈다. 이소룡 주연의 <용쟁호투>. 그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과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브루스 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정글게임」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내의 행방에 관심을 끊은 지가 언제부터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리라. 아내와 그는 마주쳐도 별 할 말이 없다. 그저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리면 조금 덜 외로울 뿐이다. 오늘도 나는 서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켠다. 여기저기 사이트를 배회하는데...
저자 소개
정태규(鄭泰圭)
58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다.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 사대 국어교육과 및 부산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하다. 90년에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등단하다. 창작집 『집이 있는 풍경』을 94년에 출간하다. 이듬해 콩트집 『물로 칼베기』 출간하다. 96년에 단편 「길 위에서」로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하다. 현재 분포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다.
목차
차례
솔베이지의 노래
길 위에서
구글 어스
시간의 향기
겨울에서 봄으로
육교를 건너서
감춰진 머리
브루스 리를 추억함
정글 게임
해설 - 구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