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3의 시각, 비판적 지역주의를 말한다
지방-지역-세계라는 중층적 인식 아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는 구모룡 교수의 평론집이 출간되었다. 2006년에 펴낸 『시의 옹호』가 시론에만 한정하고 있었다면, 이번에 펴낸 『감성과 윤리』는 20세기 끝자락부터 21세기 초입에 걸친 10년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한 글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시론, 소설론, 문학제도론, 지역문학론, 메타비평론 등 문학전반에 관한 저자의 입장에는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목소리가 한결같이 녹아들어 있다.
1부에서는 근대성, 땅, 고통, 파시즘, 주변부 등의 개념으로 문학의 지평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구모룡 교수의 오랜 탐구 과제들로, 우리의 근대성을 따져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일이 오늘날 우리 문학이 직면한 핵심주제라는 저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글들은 세계화, 지역화, 문학공동체, 지역문학 등을 다루고 있는 4부와 여러 선후배 비평가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5부와 연관된다. 1부와 4부, 5부를 이어 읽음으로써 저자의 입장과 개성을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와 3부에는 각각 시론과 소설론을 수록하였다. 2부에서는 김수영, 이선관, 유병근 등 시인들이 전개한 시적 국면들을, 3부에서는 김정한, 유현종, 김하기 등 소설가들이 서술한 삶의 정황들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김수영으로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하였고, 김정한을 통해 지역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각각 2부와 3부의 첫머리에 놓인 김수영론과 김정한론을 통해 저자가 자신의 비평적 원점을 재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은 감성이기도 하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 책의 표제인『감성과 윤리』에는 “문학은 감성이기도 하고 윤리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화두가 집약되어 있다. 구모룡 교수는 그동안 시와 파시즘의 관련 양상에 대해 고찰하거나 감성 없는 윤리에 대한 비판을 지속하면서 ‘감성’과 ‘윤리’를 함께 고민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중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저자는 ‘책머리에’를 통해 “요즘 와서 자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감성이라는 문제를 설정하게 됩니다. 시적인 것 나아가서 미적인 것이 존재의 축복이 되는 길을 찾아보려는 것인데, 지금껏 저의 비평은 감성의 지평을 일정하게 제약하는 입장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윤리 쪽에 보다 경도된 저자의 입장은 제1부 ‘고통의 시학’에서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고통은 삶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전제 아래 저자는 “시인들은 고통을 어떻게 말하는가, 회피하는가, 기꺼이 함께하는가? 고통을 매개로 시적 인식은 확장될 수 있는가, 또한 시적 주체는 변화하는가? 그리고 시를 통한 고통의 연대는 가능한 일인가?”(38쪽)라는 통렬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구모룡 교수는 ‘서정은 고통을 회피한다’ 혹은 ‘서정은 자기 고통만을 말한다’라는 시에 대한 오랜 오해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시를 ‘자기표현’에 한정시키지 말고, ‘나르시시즘적 주체로부터 벗어나는 거듭되는 노력’ 즉 ‘시적 과정’의 차원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무관심과 무목적성이야말로 무통시학의 불감증을 대변하는 개념이라 비판하고, 고통을 통하여 생명의 ‘화엄’에 도달하는 과정이야말로 고통시학의 궁극적인 지향임을 밝히고 있다.
주변부적 삶과 시의 길
중층적 현실 속에서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일은 자칫 이분법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많으며, 그 위계를 고착시킬 우려 또한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중심과 주변을 나누어 살피려는 까닭은 주변부 지역 시인들에게서 발견한 가치와 그들의 노력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시쓰기는 중심부의 주류적 흐름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자본과 기술의 이데올로기와 거리가 먼 장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나 기술이 주도하는 중심부의 역장은 시의 형질마저 바꾸어 내고 있다. 시든 소설이든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변신 가능하다는 생각이나, 대중문화와 시가 몸을 섞으면서 시적 지향들이 모호해지고 있는 현상들이 그 예다.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시적 쇄신으로 받아들이는 ‘미래파’의 시 작업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할 소지가 있다.
구모룡 교수는 ‘새로움의 이데올로기’를 견제하며, 한결같이 주변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하종오, 정일근, 이중기, 양문규, 박규리, 유승도, 배한봉, 권선희―등을 호출한다. 저자는 “언어와 욕망 사이에 존재하며 이들을 제어함으로써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에 이르려는 이들”을 시인으로 정의하는데, 이들이야말로 ‘시인’의 이름에 값하는 자들인 것이다. 물론 복고나 퇴행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견제하는 한편, 중심부가 주변부의 시적 가치들을 패션으로 바꾸어 놓을 가능성 또한 경계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경계에서 ‘시적 소외’는 ‘시적 축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삶과 자연, 노동과 사랑, 생명과 우주를 찾고 느끼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길. 주변부적 시각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이와 같은 주제들이 세간의 관심에서 밀려나고 때론 억압받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주변이야말로 시의 토대이다.” (71쪽)
지역문학은 대안일 수 있는가?
자본과 제도의 서울 집중으로, 주변부 지방은 ‘식민화’된 지 오래다. 다시 말해 지독한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저자는 지역문학공동체에 주목한다. 지역문학공동체는 중심부의 상징독점에 반발하는 감정적 지방중심주의로 시작되지만, 지역적 불균등발전론에 대한 객관적인 자각으로 발전할 가능성 또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중심주의가 작동하기 이전의 모든 문학은 지역문학이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보면, 영남과 호남 그리고 기호가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식민지 근대를 살펴보아도 김소월, 염상섭, 백석, 윤동주, 채만식, 김유정, 김정한, 김동리, 박목월 등이 모두 지역적 기반 위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역문학의 곤경이 발생한 것은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 집중적 국가시스템에 기인하며, 이에 따라 지역문학의 존재의의를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찾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20세기 후반부터 활성화되고 있는 지역문학 담론의 핵심은 문화정치학에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심부에 의해 지역이 소외되어 있으니 중심부를 비판하고 지역의 존재의미를 부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역문학은 중심부라는 대타자를 공격하면서 성장하는 사생아적 문학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지역문학은 토마스 하디의 웨식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처럼, 이병주의 지리산, 박경리의 통영과 하동, 김정한의 낙동강, 김원일의 진영, 현기영의 제주처럼, 구체적인 장소와 공간을 통해 형상화된 문학이라는 것이다.
지역문학은 중심부의 미적 척도와 상징권력 그리고 그것이 만드는 상징폭력을 견결히 극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결코 중심부와의 투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자기에게 정직한 데서 진정한 지역문학은 태동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판적 지역주의’야말로 지역문학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으로 본다. 비판적 지역주의는 지역성을 구심력과 원심력이 길항하는 장으로 파악하면서 지역성의 구체성에서부터 세계에 이르는 전체성을 획득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구모룡 具謨龍
1959년 경남 밀양의 농촌에서 태어나 중등학교 이래 줄곧 부산에서 공부하고 있다. 1982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해 왔다. 그동안 무크지 《지평》, 비평전문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 시전문계간지 《신생》에 관여하면서 지방-지역-세계라는 중층적 인식 아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저서로 『앓는 세대의 문학』,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해양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옹호』 등을 상재하였다. 현재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차례
책머리에
제1부 시의 지평
근대성과 미적 초극의 길
땅의 시학을 위한 단상
고통의 시학 ― 시와 고통 문제에 관한 서론
시와 파시즘의 문제
주변부적 삶과 시의 길
제2부 감성과 윤리
자유라는 시적 원형 ― 김수영과 거제 포로수용소 체험
고통과 사랑 ― 이선관론
정황(情況)들 ― 유병근의 시
자연스럽게 사는 삶의 의미 ― 도종환의 시
마음의 동살 ― 정인화의 시
향수와 비애 ― 고영민의 시
풍경과 시간 ― 최하림, 엄원태의 시집
죽음과 사랑 ― 유홍준, 김소연의 시집
제3부 삶과 성찰
21세기에 던지는 김정한 문학의 의미 ―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요산문학
민중에 대한 애정과 낙관 ― 유현종의 『들불
식민지의 기억 ― 김하기의 『식민지소년』
상처와 상실 ― 정태규의 소설
종교적 삶에 대한 물음 ― 박명호의 『가롯의 창세기』
해양소설의 경험적 지평 ― 옥태권의 소설
위악과 폭력의 관계 양식 ― 정영선의 소설
제4부 문학과 공동체
한국 문학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지역과 지역의 네트워킹 ― 지역이라는 곤경을 벗어나는 방법
세계화와 지역문학
장소와 공간의 지역문학
제5부 입장들
동아시아적 시각, 동아시아 문학론 ― 최원식의 동아시아론 읽기
못 다한 신생 ― 김양헌의 비평세계
문학비평의 존재의의 ― 유종호, 김주연, 김종철, 황종연, 방민호의 비평
시의 사회적 존재론 ― 홍용희와 이혜원의 비평
위기의 시대, 비평의 길
변화하는 대학사회와 문학비평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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