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지음 | 조정민 옮김
쪽수 | 3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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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48*210 |
ISBN | 978-89-6545-181-5 03830 |
가격 | 16000원 |
발행일 | 2012년 7월 23일 |
분류 | 외국 에세이 |
책소개
국가와 가부장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
이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이자 일본의 젊은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쓴 수기이다. 그녀는 일본과 조선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같이 생활하고 옥중에서 결혼하였으며, 천황과 황태자의 암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아 수감되어 있던 중 23살의 나이로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지금은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옆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불꽃 같은 삶은 국내에서 관련 도서나 「KBS 스페셜」 등을 통해 발표된 적이 있다.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사망 86주기에 맞춰 발간된 이 수기는 어린 시절부터 박열과의 동거까지를 다루고 있다. 독자들은 가네코 후미코가 무슨 생각으로 이 짧은 생을 살았는지,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주받은 나의 생활 최후의 기록”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가난하고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인 탓에 취학 연령이 되어도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사설 학교에서 잠시 공부했으나 이마저도 생활고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후미코의 이모)과 새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도 재혼을 거듭하면서 후미코는 친척집에서 지내다 1912년에 당시 충청북도 부강에 살던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가 약 7년간 생활한다. 그곳에서 식모로 전락한 후미코는 자살까지 결심할 정도로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았다.
수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에서의 유년기는 그녀의 인격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후미코는 배움을 열망하게 되었고, 부당한 폭력에 대한 투쟁을 마음먹게 되었으며, 자신처럼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1919년에 파양되어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다음 해 봄에 배움의 뜻을 안고 도쿄로 상경한다. 신문팔이, 노점상, 행상, 식모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고학의 길을 걸었지만 도쿄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남들이 선망하는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인생의 목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일에 열정을 갖던 당시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고학을 하더라도 훌륭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하다고 대접받는 사람만큼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남자들의 장난감으로 살아왔다. 나는 나 자신을 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그것을 깨달아 실천하고 싶다.(‘일! 나 자신을 위한 일!’)
이후 후미코는 더 이상 고학에만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다. 사회주의자, 부르주아, 조선인 유학생, 기독교도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고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히비야에 있는 속칭 ‘사회주의 오뎅’이라 불리는 요릿집에서 일하던 어느 날, 『청년조선(?年朝鮮)』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犬コロ)」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후미코는 1922년 4월경부터 박열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후미코를 박열의 부인, 전시에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는 문제가 있다. 그녀는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일본인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혁명가였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심지어 친척과 가족마저도 그녀를 끊임없이 학대하고 억압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결코 나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에 감사하고 그것을 자신이 성장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한 주어진 상황을 무력하게 비관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다. 나는 이미 자립할 수 있는 연령에 달해 있다. 그렇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도쿄로!)
아무리 우리 사회에서 이상을 가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자신을 위한 일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을 성취하든 성취하지 않든 그것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진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진정한 생활인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은 곧 우리와 일치된다. 먼 저편에 이상적인 목표를 두는 것과 다른 것이다.(‘일! 나 자신을 위한 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열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항상 성실하고 솔직했으며 자신의 욕망과 이상에 충실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일함으로써 자신의 자립과 진정한 독립을 추구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라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에 맞선 한 여인의 투쟁의 삶을 담은 이 수기는 어떠한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네코 후미코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유일한 선물이다.
작가소개
저자 :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1903년 1월 25일 요코하마시 출생. 아버지 사에키 분이치와 어머니 가네코 기쿠노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무적자’로 살았다.
1912년, 당시 충청북도 부강에 살던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가 약 7년간 생활한다. 이때 외할아버지 가네코 도미타로의 다섯째 딸로 입적한다.
1919년 4월 12일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1920년 봄에 상경하여 신문팔이를 하면서 학업을 병행한다. 거리 연설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만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니힐리즘에 심취하였다.
잡지 『청년조선(?年朝鮮)』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犬コロ)」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후미코는 1922년 4월경부터 박열과 동지로서 동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간행에 착수하여 1호와 2호를 발간하고, 흑도회가 해산한 이후에는 월간지 『후테이센징(太い鮮人)』(불량하고 불온한 조선사람이라는 뜻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빗대어 말함)을 발간한다. 그리고 1923년 4월에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한다.
관동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3일, 후미코와 박열은 보호검속 명분으로 구속되고 10월 10일 치안경찰법위법으로 기소된다. 1924년 2월 15일 폭발물취급벌칙 위반으로 추소, 이어 1925년 7월 17일 박열과 함께 대역죄 및 폭발물취급벌칙 죄로 기소된다. 1926년 2월 26일, 후미코와 박열에 대한 대심원특별형사부의 공판이 시작되고 3월 25일에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어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역자 : 조정민
부경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대학 비교사회문화연구과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전후 일본문학이 패전 후 연합국의 일본 점령을 어떻게 기억하였는가에 대해 관심이 많아, 같은 테마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만들어진 점령서사』(산지니, 2009)를 출간하였다. 지금까지 전쟁, 점령, 민족, 젠더, 언어 등의 문제가 서로 교차하면서 어떤 위계가 만들어지고 또 무너지는지에 대해 주목해왔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군국주의적 천황제의 억압과 통제에 추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을 분명히 실천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감동하여 그녀의 수기를 번역하게 되었다. 현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로 있다.
차례
잊지 못할 모습―구리하라 가즈오
첨삭에 관한 나의 희망
머리말
제1부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
고바야시의 고향
어머니의 친정
제2부 조선
새로운 집
부강
이와시타 가문
조선 생활
고향으로 돌아가다
제3부 다시 고향으로
호랑이 굴로
소용돌이치는 성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제4부 독립
도쿄로!
작은 외할아버지댁
신문팔이
노점상인
식모살이
거리의 방랑자
일! 나 자신을 위한 일!
맺음말
역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