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이제 크노트 지음 | 서요성 옮김
쪽수 | 1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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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27*188 |
ISBN | 979-11-6861-413-0 03300 |
가격 | 18,000원 |
발행일 | 2025년 1월 20일 |
분류 | 독일철학 |
책 소개
같은 거리에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와 흑인 작가
한 편의 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충돌과 대화
1954년, 워싱턴의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은 헌법을 위반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1957년 아칸소주의 리틀록에 사는 아홉 명의 흑인 학생에게 지역 공립 고등학교의 입학이 허가되었다. 이후 흑인 아이들의 등교는 수많은 백인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으며 백인과 흑인 사이에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59년 발표한 에세이 「리틀록 사건을 돌아보며」에서 백인들의 반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무대로 삼은 흑인들의 운동을 비판했다. 아렌트에게 흑인 차별은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며 학교에서의 인종 차별 철폐는 정치적 과제가 아닌 사회적 과제였다. 그는 흑인 대표 단체가 일반적인 인권, 시민권, 보통선거권이 아니라 노동, 주택 시장, 교육과 같은 사회적 차별에 집중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녀의 성장을 설계할 권리는 부모에게 있고 아이들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리틀록의 아이들을 어른의 싸움에 끌어들인 점에 우려를 표했다.
당시 흑인 소설가 랠프 월도 엘리슨은 이러한 아렌트의 입장에 분노했다. 그리고 로버트 펜 워렌의 책 『누가 검둥이를 대변하는가』에 실린 인터뷰에서 “초점이 너무 빗나갔”(167쪽)다는 말로 아렌트를 비판한다. 이 인터뷰를 읽은 아렌트는 1965년 엘리슨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기에 이른다. 『뉴욕 거리의 한나 아렌트와 랠프 엘리슨』은 아렌트가 쓴 한 편의 에세이, 그리고 한 통의 편지에서 출발하고 있다.
어쨌든 저는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무자비한 폭행, 신체의 본능적인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어요. 너무나도 정확한 당신의 소견 덕분에 제가 상황의 복잡다단함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어요.(한나 아렌트가 랠프 엘리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5쪽)
편지를 썼던 당시 한나 아렌트는 뉴욕 리버사이드 드라이브가 370번지에, 랠프 엘리슨은 730번지에 살았다. 같은 거리에 살았던 유대인 정치 철학자와 흑인 소설가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었던 것일까. 유대인으로서 차별을 경험했던 아렌트는 왜 흑인 학생들의 강제적 통합에 반대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추후에 그 생각을 바꾸었을까. 『뉴욕 거리의 한나 아렌트와 랠프 엘리슨』은 똑같이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흘러들어 온 유대인과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에 어떠한 대조적인 조건과 입장이 존재했는지 파고든다. 저자 마리 루이제 크노트는 한나 아렌트와 랠프 엘리슨이 남긴 저작과 기록물, 편지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번영과 발전으로 가득했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내었다.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인간’ 흑인,
아렌트가 간과한 반유대주의와 흑인 박해의 출발선
랠프 엘리슨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은 흑인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바라보는 백인의 폭력을 고발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흑인 대학생은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자신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임을 깨닫고 방황하다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숨어든다. 미국 사회의 소외를 나타내는 지하실, 지하 은신처는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외부 세계로부터의 보호 공간이자 수치심과 분노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내면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했던 당시 흑인의 상황이 묵직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흑인에게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었다. 흑인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런 이유 없이 두들겨 맞고, 살해되었다. 백인의 폭행으로 흑인이 날마다 죽었지만 범인 대부분이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흑인은 행운이나 우연에 기대어서만 생존할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1954년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흑인에게 큰 환호를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 흑인 아이들에게 드디어 “기적 같은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아렌트의 주장은 흑인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엘리슨에게도 흑인의 고통은 매일매일 벌어지는 현실이었다. 아렌트는 흑인의 이러한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유사함은 있겠지만 유럽의 유대인에게 흑인의 것과 같은 기나긴 노예의 역사는 없었다. 아렌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그러한 이유로 대학입학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렌트의 문제의식과 엘리슨의 경험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저자는 아렌트가 비록 흑인의 상황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흑인과 백인의 불평등을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리틀록 사건을 돌아보며」에서 투표권, 시민권,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와 같은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기본권을 법으로 제정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섰고 정치에서 노예제도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애썼다. 인종 차별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과 흑인으로서 엘리슨의 경험과 의식은 곧게 뻗은 거리처럼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그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헌법적으로 공존하는 “해방의 시간”이 오기를 원하였고, 엘리슨 또한 그의 작품에서 마침내 모든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를 염원했다.
아렌트는 흑인 박해에 대한 직접적인 저작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아렌트의 편지와 그의 행보를 통해 독자들은 아렌트의 정치적 목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노예제도의 유산에 대한 책임 있는 처리 방식을 모색했고, 흑인에게 능동적인 정치 참여를 보장할 권리를 부여하는 평등 수정헌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쌓아온 한나 아렌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렌트의 과오와 성찰을 재검토한다. 20세기 중반 벌어졌던 두 인물 간의 첨예한 논쟁은 오늘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종 차별에 대한 보다 깊은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연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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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p41-42
억압은 현실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흑인이 백인의 폭행으로 죽어갔다. 범인 대부분이 유죄 판결은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는 처벌받지도 않고 최악의 경우에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합법화되는 온갖 불의가 정의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불의가 용인된다면 권리와 법에 어떤 권위가 더 있겠는가?
p74-75
엘리슨은 아렌트의 입장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하지 않았고, 아렌트가 대의를 해치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렌트가 흑인의 상황에 대해 문외한이며 모든 흑인 어머니의 머릿속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간단히 확인했을 뿐이다. 아렌트가 상상하는 ‘보호받는 유년기’가 미국의 흑인에게는 전혀 없었다. 수많은 흑인이 불안정하게 살았고, 일부는 엘리슨이 말했듯이 여전히 한 번도 “진짜” 신분조차 갖지 못했다. 당시에 신분이 없다는 것은 정식 출생신고도, 직업도, 보험 카드도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p124
아렌트가 볼 때 집단의 죄는 없다. 죄는 간단히 말해 언제나 개인의 행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단의 책임은 있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행위를 회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 미래 공동체의 회복을 기획할 책임이. 아렌트는 집단의 책임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태어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의 책임을 주장하기 위해 한편으로 노예제도의 유산에 대한 책임 있는 처리 방식을 모색했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공동의 정치적 “약속”을 찾아내려고 했다.
p167-168
흑인 부모는 그러한 사건이 자녀에게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임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모든 흑인 아이가 (조만간) 사회적 테러의 무자비한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많은 흑인 부모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아이는 바로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테러에 직면하고 공포와 분노를 억압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모든 흑인 아이는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내면의 긴장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만약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또 다른 희생자가 돼요. 이런 요구는 무자비한 측면이 있지만 아이가 이 기초 시험에 붙지 못하면 아이의 삶은 더 무자비해지죠.
저자 소개
지은이
마리 루이제 크노트(Marie Luise Knott)
비평가, 작가, 번역가로서 베를린에 살고 있으며, 특히 한나 아렌트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출간했다.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2011)은 8개국어로 번역되었고 라이프치히 도서전 상 후보에 선정되었다. 그는 철학 에세이 『뉴욕 거리의 한나 아렌트와 랠프 엘리슨(370 Riverside Drive, 730 Riverside Drive)』(2022)으로 레히 철학 심포지움으로부터 트락타투스 상(Tractatus-Preis)을 수상했다. 현재 시에 대한 칼럼 「타그티갈(Tagtigall)」을 문화 웹진 『펠렌타우허(Perlentaucher)』에 기고하고 있다.
옮긴이
서요성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마인츠 대학교 객원교수와 한국브레히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대구대학교 문화예술학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는 「도축장의 성 요한나」(『브레히트 선집』), 『빌헬름 텔 인 마닐라』, 『심지층 저장소』가 있고, 저술로는 『가상현실 시대의 뇌와 정신』(제34회 한국과학기술도서상 저술상 수상), 『공연예술의 초대』, 논문으로는 「변증법적 연극-브레히트의 후기극에 대한 이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치료과정에서 대화의 의미와 정신분석학 개념들의 형성들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1. 우리 유대인
2. 발언권 사용
3. 겨울잠
4. 불안
5. 평등
6. 가늠할 수 없는 감정
7. 청산하지 못한 과거
8. 희생의 이상
9. 계몽의 변증법
10. 만남
11. 공화국
12. 종신형
13. 투표권을 갖는다는 것
14. 가능성
15. 경험
16. 각각의 정체성
17. 사과
랠프 엘리슨과 로버트 펜 워렌의 인터뷰: 무자비한 폭행과 희생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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