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사회

구유심영록

량치차오 지음 | 이종민 옮김
쪽수
352쪽
판형
152*225
ISBN
978-89-6545-333-8 94820
978-89-6545-329-1(세트)
가격
25000원
발행일
2016년 02월 01일
분류
중국근현대사상총서 002

책소개

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문명 조건에 대한 량치차오의 예언

『구유심영록』은 중국의 계몽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가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여행을 통해 관찰하고 느낀 생각의 기록이자 신문명의 길을 찾아가는 탐험의 여정이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평화회의가 열리는 유럽을 방문한 량치차오와 그 일행이 각국을 여행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시점에서 그간의 관찰한 것들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서구 자유주의 문명이 폐허가 된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세계 변화에 대한 통찰과 새로운 문명의 탐색을 거시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사상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량치차오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자세는 『구유심영록』이 처음 출간된 지 백 년이 지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큰 의미를 가진다.


세계대전 후 유럽 사회와 새로운 문명 재건의 미래

전체적으로 볼 때 『구유심영록』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성찰과 예언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문명을 신봉한 량치차오에게 세계대전은 서구 근대문명의 환상을 깨트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구유심영록』은 서구 문명이 파국으로 치달았던 원인에 대해 반문하는 형식을 통해 신문명 건설에 대한 량치차오의 성찰을 보여준다. 더불어 진보주의적 시각과 인문주의적 사고를 오가며 새로운 문명의 조건을 예언한다.
『구유심영록』의 1장은 총론에 해당하는 글로,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에서는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사상·문화적 원인과 신문명의 미래에 대해 서술하였고, 하편에서는 중국인들이 자각해야 할 시대적 과제와 중국 문명이 신문명 건설에 기여할 가능성과 책임 문제 등을 피력한다. 량치차오는 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서구 근대문명의 위기를 과학만능주의와 연계지어 분석하고 있는데 과학 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으로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향유하고 개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근대문명의 꿈이 세계대전과 빈부격차로 인해 무너졌다고 보고 있다. 또한 전쟁과 사회적 불평등이 근대문명을 지배하고 있던 ‘순물질적이고 순기계적인 인생관’인 과학만능주의 및 학술계의 생물진화론과 자기 본위의 개인주의에서 연유한다고 인식한다.
유럽이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지만 런던에서의 첫 여행을 담은 3장을 통해 영국 정치의 기반이 되는 국민들의 높은 정신과 국민성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자아발전을 위한 불굴의 정신으로 순기계적인 인생관에 커다란 변화를 인식하고, 전쟁의 충격과 상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럽 사회의 변화를 감지해 향후 상호부조와 인격론을 통한 협력과 소통의 세계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새로운 문명 건설의 길이라는 점을 통찰한다.


량치차오, 신문명 건설을 위해 중국 전통사상에 주목하다

당시 유럽에서 제창된 실용철학과 창조론철학은 이상을 현실에 대인해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 이에 량치차오는 중국 전통사상에 주목하며 중국 선진시대의 사상이 ‘이상과 실용의 일치’라는 목표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인식한다. 더불어 유럽 지식계가 공자, 노자, 묵자 및 불교가 걸어간 길을 따라간다면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명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구유심영록』에서구 물질문명의 위기를 중국 정신문명으로 구원한다는 문화보수주의적 시각이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량치차오가 근대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이데올로기로서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나 과학 전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 독자 여러분, 과학을 비하한다고 절대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결코 과학의 파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과학만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33쪽)

번역을 맡은 이종민 교수는 해제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중국 정신문명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중국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호부조와 인격론을 통한 협력과 소통의 세계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중국 정신문명이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사상적 자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하며 “서양문명으로 중국문명을 확충하고 중국문명으로 서양문명을 보완하여 두 문명의 화합을 통해 신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량치차오의 신문명 건설의 요건을 정리한다.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주목과 ‘국제노동규약’

량치차오는 무엇보다 세계대전 이후 현실 국제정세를 좌우하게 될 파리평화회의에 상당히 주목한다. 『구유심영록』의 4장에서 량치차오가 파리 현지를 둘러보며 평화회의의 주체국과 기타 나라들을 짚어보고, 평화회의의 유형과 주요 인물, 의제 등을 접했음을 볼 수 있다. 량치차오는 평화회의 에피소드들의 개괄적인 설명과 더불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힌 평화회의의 실제 진행과정과 그 내막에 대한 강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평화회의의 결과로 체결한 베르사유조약의 3대 부분 중 하나인 ‘국제노동규약’은 8장에서 별로로 다루고 있는데 세계대전의 주요 요인이 된 자본주의적 불평등 및 노동문제가 국제적 차원으로 확장됨에 따라 국제노동규약이 파리평화회의의 주요 의제가 된 점을 설명한다. 또한 노동의 탈상품화와 노동자의 행복증진을 위한 공동원칙 및 조직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첫걸음이 국내외 경제구조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일임을 설한다.
량치차오는 중국인들이 국제연맹 문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국제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하게 생각했는데 이 문제 역시 국제평화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부문이고 이번 파리평화회의가 이룩한 주요사업이라고 인식한다.


국가 간의 평화체제, 세계주의 국가, 탈상품화된 노동사회 등

량치차오가 예언한 새로운 문명의 구성원
량치차오는 『구유심영록』을 통해 서구 자유주의 문명이 파국으로 치달은 원인을 반문하며 새로운 문명 건설을 위한 요소들을 살펴본다. 먼저 국가 간 경쟁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일을 급선무라 주장하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개별 국가들이 내부의 국가주의를 통제하고 국가 간의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세계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서술한다. 아울러 세계정부 역할을 수행할 국제연맹 건립과 평화체제의 위협요소가 되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불평등을 타파하고 국제노동연맹을 통한 탈상품화된 노동사회 건설을 주장한다. 이상으로 볼 때 국가 간의 평화체제, 세계주의 국가, 국제연맹, 탈상품화된 노동사회, 인생관, 문명융합 등이 바로 『구유심영록』에서 량치차오가 예언한 새로운 문명의 구성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유심영록』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가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출구를 탐색하는 개방적인 텍스트로 다가갈 것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편향인 개인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약육강식을 비판하면서도 자유, 과학, 진화 등이 지닌 의미를 현시대의 맥락에서 되살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승인하면서도 불평등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과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수용한다. 국가주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국가 간 경쟁체제를 비판하면서도 현실 정치단위로서 국가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국가와 세계가 소토하는 세계주의 국가를 제창하며 이러한 국가들의 관례를 조정하는 세계정부로서의 국제연맹을 통해 국가 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고 한다. 량치차오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세상으로의 믿음직한 나침판이 될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량치차오 

자는 주어루(卓如), 호는 런공(任公), 별호로는 아이스커(愛時客), 인빙(飮氷), 인빙스주인(飮氷室主人) 등이 있다. 1873년 광둥(廣東) 신후이(新會)에서 태어나, 6세 때 사서오경을 떼고 12살에 수재, 17세에 거인(擧人)이 되었다. 1890년 광저우(廣州) 만목초당(萬木草堂)에서 캉유웨이로부터 경세치용(經世致用)과 변법(變法) 이론을 공부했다. 1895년 베이징 회시(會試)에 캉유웨이와 함께 참가해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올렸으며, 이를 계기로 변법유신운동에 뛰어들었다. 변법운동 기간 중에 『시무보(時務報)』를 발간하고 「변법통의(變法通義)」를 발표하였으며 『서정총서(西政叢書)』를 편집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캉유웨이와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혁명파에 반대하는 한편,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 『신소설(新小說)』등의 잡지를 펴내는 등 활발한 계몽활동을 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는 위엔스카이(袁世凱) 국민정부에서 사법총장을, 돤치루이(段祺瑞) 정부에서 재정총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을 하였다. 1920년, 1년간 유럽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등을 저술하고 칭화대학과 난카이대학(南開大學)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등 학술활동에 매진하다 1929년 1월 베이징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저작으로 『신민설(新民設)』, 『중국 학술 사상의 변천을 논함(論中國學術思想變遷之大勢)』,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등이 있으며, 대부분의 저작은 『인빙스합집(飮氷室合集)』에 실려 있다.


역자: 이종민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밭대학교 중국어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경성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글로벌차이나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5년 베이징대 중문과에서 고급진수 과정을 수료하였고, 2001년에는 베이징수도사범대학 교환교수, 2009년에는 홍콩 링난대학 방문학자를 역임하였다. 2003년 중국전문잡지 『중국의 창』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중국현대문학학회와 현대중국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주된 연구 관심은 중국 근현대 사회사상과 문화 분야이며 아울러 복지사회주의의 관점에서 21세기 중국의 길과 그 전망에 대해 비평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흩어진 모래』,『글로벌 차이나』, 『근대 중국의 문학적 사유 읽기』, 등이 있고, 번역서로 『진화와 윤리』, 『중국소설의 근대적 전환』, 『천연론』(공역)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눈사람의 품』을 출간하였다.


 

차례

차례


1장 _ 유럽여행 중의 일반적 관찰 및 감상
상편: 대전 전후의 유럽 | 하편: 중국인의 자각
2장 _ 유럽으로 가는 도중에
3장 _ 런던에서의 첫 여행
4장 _ 파리평화회의 조감
5장 _ 서유럽 전장 형세 및 전쟁국면 개관
6장 _ 전장 및 알자스 로렌 지방 기행
7장 _ 국제연맹에 관한 평론
8장 _ 국제노동규약에 관한 평론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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