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준 지음
쪽수 | 25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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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52*225 |
ISBN | 978-89-6545-677-3 03990 |
가격 | 20,000원 |
발행일 | 2020년 11월 5일 |
분류 | 한국인물사 |
책소개
먼구름 한형석 탄생 110주년 기념
음악과 연극으로 조국 광복을 노래한 독립운동가, 『한형석 평전』출간
부산 문예인의 아지트인 부산포식당의 편액에는 ‘그냥 갈 수 없잖아’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편액이 걸린 장소를 생각하면 한잔 술을 나누자는 직접적인 표현같지만, 그 안에는 나라를 찾아야 가지 그냥 못 간다, 빼앗긴 조국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독립군의 기상이 담겨 있다. 이 글귀는 중국 관내에서 예술구국활동으로 한국 독립 운동의 사기를 드높였던 한형석(韓亨錫, 1910~1996)이 직접 쓴 것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예술부장,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내고 한미합동 OSS 특수공작훈련을 받기도 한 독립유공자, 음악가 겸 문화운동가인 한형석. 그는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 감시를 피해 항일예술활동을 할 당시 ‘한국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다’라는 뜻의 한유한(韓悠韓)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여, 한동안 그의 업적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2020년은 한국독립군 창립 80주년이자, 적후방 선무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한형석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형석의 고향이자 귀국 후 주요 문예활동지였던 부산은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한형석 평전』출간을 기획했다. 저자 장경준은 2006년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형석 선생 서거 10주년 기념 특별전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정신-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기획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전을 집필하게 됐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역사박물관에서 오랜 기간 일하면서 쌓은 저자의 지식과 경험이 더해져,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로서의 한형석의 활동과 아버지 한형석의 면모까지 꼼꼼히 전한다.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항일예술가 한형석의 모습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예술구국과 문화예술운동에 생을 바친 한형석을 만나보기를 바란다.“아버지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예술 구국에 매진하거라”
항일예술가 한형석,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예술로 맞서다
아버지 한흥교의 뒤를 따라 항일운동에 투신할 방법을 고민하던 한형석은 1929년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조성환의 조언으로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 진학한다. 한형석은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예술적 재능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단결에 쓰겠다는 자신의 투쟁 노선을 정한다. 이것이 예술구국운동가 한유한의 탄생 배경이다.
“우리는 한국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_압록강 행진곡
우리가 부를 때는 군가가 아니고 주술이었다_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 김유길한형석이 한국독립군으로 참여할 당시는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운동세력에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던 시기로, 전면적인 대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이 차례로 창설됐다. 한형석은 당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고취시키기 위해 중국 관내에서 적극적인 항일예술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들로 <신혁명군가>, <승리무곡>,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을 창작하여 궁핍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원들이 지치지 않도록 사기를 드높여서 한인무장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중국에 울려 퍼진 삼천만 조선민족의 노래 <아리랑>
1940년 5월 15일 중국 시안에서 초연한 삼천만 조선민족의 염원을 담은 항일가극 <아리랑>은 당시 현지에서 발행되던 신문지면에 연일 보도되며 주목받았다.
매일 아침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리랑 노랫소리는
중국인들이 한인 혁명가들을 동정하도록 만들었다_<옹화도문잡지>, 1947항일가극 <아리랑>은 한국민족의 전통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신선한 극 구성으로 작품성뿐만 아니라 한·중연대의 모범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혁명 가극 <아리랑>은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고 있어 장제스, 쑹메이링을 비롯한 중국인 항일투쟁 주요 인사들에서 중국 인민들까지 나라 잃은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데 영향을 줬다.
항일전쟁에서 예술로 투쟁한 한형석, 그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으로 적후방 선무공작에 나서 중국 관내에서 한중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긴밀히 연계하고 공동 투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연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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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 밑줄긋기
첫문장
1948년 9월, 가을색이 완연한 서울 한강변을 거닐던 한 사내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p. 64
‘비록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다 해도 스스로 더 큰 뜻을 이룬다면 불효가 아니다.’라는, 스스로 찾은 해답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버지가 바랐던 의술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되 그 안에 조국의 흙과 태극기의 의미를 새기고자 결심한 것이다.
p. 86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중 두 민족의 적은 일본제국주의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되지 않는 한 한중 두 민족의 해방은 가망이 없다.’라며 한중 공동의 적인 일본군에 맞서 싸울 태도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P. 91
가극 <아리랑>은 한형석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당시 시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중국항적후원회(中國抗敵後援會) 활동에 동참하고자 기획했다. 중일전쟁으로 군수물자가 부족해지자 전방 장병들을 위문하고 하복 제작비용을 모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P. 94
가극 <아리랑> 공연은 당시 시안의 <서북문화일보>, <서경일보>, <공상일보> 등 중국 언론으로부터 ‘긴장감 있는 구성’, ‘짜임새 있는 줄거리’, ‘음악과 배경까지 근래 드문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또 음악사적으로 완성된 가극 형태를 갖춰 초기 단계에 있던 중국 가극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았다.
P. 113~114
이범석은 예술 분야의 요직을 권하며, 그가 원한다면 힘써줄 의향이 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한형석은 이범석의 호의를 감사하게 여길 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국에서 싸웠던 이유는 단 하나, 조국을 되찾기 위함이었지 개인의 영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일곱 살에 이 땅을 떠나 30년간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언어와 생활습성까지 이국인의 성향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저자 소개
장경준
인하대학교 사학과,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졸업. 18~20세기 사회경제사를 전공했다. 부산교육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으며 부산박물관, 부산근대역사관, 복천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국립항공박물관 전시교육실장으로 재직하며 전시로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역사민속학회지역 이사와 편집위원, 국립해양박물관 학술지 『해양유산(Ocean heritage)』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역주 도총(都總)』, 『광고, 그리고 일상(1876~1945)』(공저), 『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공저), 『충과 신의 목민관, 동래부사』(공저), 『궁리장영실과 과학의 나라, 조선』(공저), 『바다를 열다-개항 그리고 항구도시』(공저), 『부산 소녀 영희, 경성행 기차를 타다』(공저) 등이 있다. 에 ‘신(新)어부사시사’를 연재했다.
차례
머리말
1장 조국의 흙과 명주 태극기
1. 운명의 밤 | 2. 독립운동가 아버지, 한흥교
2장 중일전쟁과 예술구국운동
1. 예술구국운동의 첫발 | 2. 항일연극대와 전시공작간부훈련단
3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
1. 나월환과의 운명적 만남 | 2. 예술을 무기로 한 항일운동 | 3. 한국광복군으로의 편입
4장 광복과 귀국, 그리고 문화예술 교육의 실천
1. 30년 만에 밟은 조국 땅 | 2. 고향에서의 예술과 교육
부록: 한형석의 예술 작품 및 기타 자료
한형석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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